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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7. 상처 없으시게 잘 모시라

관리자 2024.03.28 09:01 조회 207
상처 없으시게 잘 모시라 



기사 출처:  mbc뉴스 2024.3.9.


"상처 없으시게 잘 모셔라"‥피고 대한민국의 2차 가해 [서초동M본부]

입력 2024-03-09 08:09 | 수정 2024-03-09 08:18

■ "상처 없으시게 잘 모셔라."

법원 출입 기자인 저는 판결 기사를 쓰던 중 과거 PD수첩 영상을 찾아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지난 2002년 군부대를 찾아온 한 군인의 어머니를, 아들뻘인 군장병 여럿이 어머니의 사지를 번쩍 들어 계단을 내려가는 장면이었습니다. 압권은 어머니를 든 군장병들에게 지시하는 부사관의 한마디. "상처 없으시게 잘 모셔라"

쫓겨난 이는 아들이 군부대 안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어 사단장을 만나러 온 어머니였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물건처럼 들어올려 부대 밖으로 내보내면서 (그 와중에 카메라를 의식한 듯) "상처 없도록 잘 모셔라" 지시하는 선임, 그리고 언제나처럼 씩씩하게 "네, 알겠습니다"라며 대답하는 장병들.

군조직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난 5초짜리 촌극이었습니다. 영상을 찾아본 뒤 고 박성식 일병의 어머니 김미숙씨와 통화했습니다. 사실 아들이 떠난 지 22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기자에게 하실 말씀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상처가 아물긴커녕 곪아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사건은 지난 2002년 7월 3일로 돌아갑니다. 강원도 강릉 육군 해안 초소에서, 초병 두 명이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사망자는 박성식 일병과 그 선임인 최 모 상병. 당시 육군 헌병대는 가혹행위를 당하던 박 일병이 선임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결론냈습니다.

헌병대가 발표한 수사 결과는 엉망이었습니다.

사고 직후의 시신과 총기의 위치, 현장보존은 기본 중에 기본인데요. 최초 발견자와 출동한 소방관, 경찰관의 말과 군 수사기관이 내놓은 결과가 서로 달랐습니다. 사고 현장이 훼손되거나 뭔가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또 사망자들은 장갑을 끼지 않았는데, 발견된 2개 총기에서 아무런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고 추가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초소에서 나온 혈흔을 석 달 지나서야 감정의뢰해 유전자조차 확인을 못했습니다.

당시 군부대를 찾아간 유가족들의 요구는 단순했습니다. 현장 재연 실시와 부검 시 비디오 촬영 허용, 소대원 면담 3가지. 그들에게 돌아온 건 "상처 없으시게 잘 모셔라" 얼마 뒤 군부대는 경찰에 유가족들을 무단침입으로 고발했습니다.


■ 22년 만에 "국가가 6천만 원 배상하라"

[김미숙/ 고 박성식 일병 어머니(지난 2002년, 국방부 앞)]
"내 아들이에요. 내 아들이 군에 가서 어떻게 생활을 하다가 왜 죽었는지 아니면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거를 알고 싶은 게 제 심정이고 그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근데 제가 지금 저희 아들 죽음에 대해서 아는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어머니는 국방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습니다. 수십 차례 재조사를 해달라는 민원도 넣었습니다. 하지만 2004년에도, 2005년에도, 또 2009년에도 재조사 결과는 똑같았습니다. 그러던 2021년,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는 당시 근무 배치부터 수사까지 총체적인 부실이 있었다고 그간의 결과를 뒤집었습니다. 후임병을 상습폭행해 영창에 가야 하는 선임자를 사람이 없다며 근무시킨 데다 현장을 은폐하고 부실수사했다는 겁니다.

1심 법원은 아들의 죽음 22년 만에 국가가 어머니에게 6천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습니다. 재판부는 "헌병대는 자녀를 군에 보낸 보호자에게 진실을 알려야 하는데도, 억울함과 오해가 없도록 충분한 조치를 하지 않아, 유족들이 위로 없이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여기까지가 기사로 제가 영상을 찾아보며 전하려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 "소멸시효 지났다"‥피고 대한민국의 '입틀막' 논리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피해자는 국가에 보상이나 배상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직접 국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나서야 합니다. 김미숙씨는 소송 제기 4년 만에 1심 판결이 나왔습니다. 그 과정은 제3자인 제가 보기에도 참 지난했습니다.

피고 대한민국. 변호사는 법무부 산하 국가 로펌인 정부법무공단 소속 변호사들이 주로 국가를 대리합니다. 국가 입장에선 손해배상액이 고스란히 세금이기 때문에, 국가의 불법행위가 명확한지, 소송을 제기한 원고가 피해를 입었는지, 손해배상액이 적당한지를 꼼꼼히 따집니다.

박 일병 사건에서 정부법무공단은 초기부터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항변했습니다. 국가배상법상 불법행위를 한 날로부터 5년이 지나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가 사라집니다. 공단 측은 박 일병이 숨진 날인 2002년 7월 내지는 헌병대가 수사를 마친 2002년 12월로부터 5년 내 소송이 제기됐어야 하는데, 2020년에 소송이 제기돼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제대로 된 사과도 못 받고 법정에 나선 어머니로서 이 주장은 '국가의 2차 가해'였습니다.

제가 지난해 말 취재한 또다른 사건이 스쳤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 '프락치' 피해자 사건. 지난 1983년, 박만규 씨는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른바 '프락치' 활동을 강요당했습니다. '붉은 학생들을 푸르게 만든다'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녹화사업입니다. 박씨는 그 뒤로 수십 년 동안 친구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피해를 호소하지도 못했는데요. 지난 2022년 정부의 독립조사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가 박 씨를 포함해 187명의 피해 사실을 인정하면서 국가의 사과와 보상을 권고했습니다.

박씨는 "재판을 통해 잘못을 명백히 가리고 국가폭력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정부법무공단은 또다시 소멸 시효 문제를 내세웠습니다. 1983년부터 5년이 훨씬 지나 소송 제기가 됐다는 겁니다. 박씨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기인데 5년 내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겠냐"며 한탄했습니다.
■ "소멸시효 주장은 권리남용"‥법원의 비판

법원은 두 사건에서 피고 대한민국의 소멸시효 항변을 비판했습니다. 박씨에 대한 배상 판결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36부는 "이미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피해사실을 인정했고, 여기엔 국가에 손해배상 청구하는 걸 수용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면서 "이를 바탕으로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청구권을 행사한 것으로 소멸시효의 완성을 주장하는 건 신의성실 원칙에 반해 용납할 수 없다"고 꼬집었습니다.

박 일병 어머니 김미숙 씨 사건에서 법원은 아예 "권리남용"이라 못박았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9단독
"어머니는 아들의 사망 원인과 경위에 의심을 품고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했지만, 군수사기관의 수사결과와 동일한 결정이 반복되다가 2021년 9월에서야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결정으로 구체적인 군수사기관의 수사 부실이 밝혀진 점 등을 보면, 어머니는 2021년 9월에 구체적인 부실수사를 알게 됐다고 봐야 하고 그 이전에는 손해배상 청구권 행사를 하기 어려운 장애사유가 있었다고 할 것이다.

(중략)

피고 대한민국이 유족에 대한 보상도 하지 않은 채 국가의 책임으로 빚어진 장애상태 때문에 소멸시효 기간이 지났다고 하는 이유로 그 책임을 면하는 결과를 인정한다면, 정의와 공평에 반하는 것으로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권리남용에 해당해 허용할 수 없다"


국가 공무원들의 조직적 관여를 통해 불법행위를 하거나 이후 조작이나 은폐를 통해 진상규명을 방해한 경우 소멸시효를 5년으로만 한정하는 건 헌법에 반한다는 판례는 이미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에서 확정돼있습니다.

심지어 정부는 지난해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문건에 "법무부는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가 장기 소멸시효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배상청구 소송에 관여하는 관련 정부기관이 헌법재판소 및 대법원 결정을 존중하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라는 의견서를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피해자들의 바람은 국가의 배상과 사과뿐입니다. 국가는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습니다. 국가의 뒤늦은 진상규명에 치유받았다가, 법정에서 입장이 바뀌는 피고 대한민국을 보면서 그 맞은 편에 앉은 피해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